ETC.
[慑异] 피처럼 무르녹은
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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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7 00:22
夏日小景에서

 김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붉은 렌틸콩은 무르녹아 곱게 풀려 있었다. 향신료의 냄새는 진하지 않았지만, 스프에 번진 붉은빛은 유난히 또렷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어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갈 물었다. 액체를 씹어삼키듯 천천히 턱을 움직인다. 마치 무언가를 삼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는 입 안 가득 퍼진 온기를 오래 머금은 끝에야 마침내 삼켰다. 목을 따라 흘러간 부드러운 따뜻함. 그러나 그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문득 세사는 그 침묵에서 어떤 거부를 느낀다. 허나 세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 사람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만든 스프였고 누군가가 내민 한 입이었다. 그리고 뱉지 않았다. 그럼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세사의 시선은 조용히 옆으로 기울었다. 병실의 테이블 위엔 몇 시간은 지난 듯한 식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병원에서 매 끼니마다 제공되는, 어딘가 무기질적인 음식. 반쯤 열린 뚜껑 아래 곡물죽은 식은 채 굳어 있었고, 숟가락은 몇 번 쓰다 만 듯 옆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가지런해 보였지만, 그 표면엔 몇 번쯤 식사를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사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식은 음식 위로 보이지 않는 어떤 체온이 겹쳐진다. 그 밤의 공기는 어딘가 버석했고, 닫힌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황야의 공기는 차가웠다. 사실 그 행위의 순간은 세사에게 더 이상 명확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저 식어빠진 온기와 약간의 숨결, 그리고 알기 힘든 표정의 얼굴로. 침대는 따로였고, 아침도 함께 맞지 않았다. 스쳐 지나간 행위는 결국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혹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남길 생각 따위는 없었거나.  허나 세사는 그 행위 이후의 자신이 예상보다 오래 흔들렸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엔 후회였다. 그 사람을 싫어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기분은 복잡하게 엉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경멸했다거나, 자신이 옳고 그가 그르다는 단순한 구도로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엇갈림의 매 순간마다 세사가 경멸한 건 언제나 자신 쪽에 가까웠다. 결국 그날 밤 먼저 달아올라 욕망을 드러낸 것도, 그의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것도 세사였으므로. 침습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사람은—패신저는 쓰러졌다. 광석병 발작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짓눌러온 병의 무게는 한순간의 무너짐으로 나타났다. 발작은 고요했고, 발견의 순간은 그보다 더 고요했다. 공학부의 일로 마지못해 패신저의 개인실 문을 열었을 때, 세사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자에 반쯤 기댄 채 물을 마시려다 멈춘 듯한 모습. 물컵은 바닥에 떨어져 힘없이 구르고 있었고, 정갈하던 평소와 달리 그의 몸은 기울어져 있었다. 패신저는 무너졌다기보다는, 그저 멈춰 선 것처럼 보였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아직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던가. 의료부에 응급 상황을 신고하고, 비치된 광석병 발작 억제제를 찾아 주사하고, 제발 누군가 도와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던 억겁의 시간.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의료부의 말에 따르면 패신저의 병은 위중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는 무난하게 회복 중이며, 상태도 안정적이라 했다. 허나 세사는 그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패신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필요한 움직임을 한다는 것만으로—그가 자신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다고는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회복기에 접어든 그는 전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 풍경은 세사를 오래도록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세사는 자주 병실 문 앞에 섰다.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건지, 무엇을 확인하려 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따금 문을 열었다. 처음엔 책임처럼 느껴졌던 방문이었으나, 그 감정은 오래 지나지 않아 방향을 잃었다. 세사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운 패신저를 바라보곤 했다. 눈을 마주친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대부분은 자신도 이유를 모른 채 조용히 돌아 나왔다. 그를 돌보고 싶었는지도,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그리고 오늘, 창문으로 비스듬히 빛이 들던 오전 무렵이었다. “……왜 또 오셨습니까.” 패신저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세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저 그를 내려다보다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 말할 힘이 있으면,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은 거네.” 감긴 눈을 피하듯 옆으로 옮긴 시선은 자연스레 침대 곁의 테이블에 멈췄다. 식판 하나. 겉은 굳고 속은 물러 있었으며, 놓인 채로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기이하게도 이 병실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그 버려진 식판이었다. 세사는 말없이 숨을 내쉬었다. 패신저는 원래부터 많이 먹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리는 음식도,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없었지만 늘 양이 적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저 넘기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남은 양이 너무 많았다. 어쩐지, 그냥 귀찮아서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 무게는 오히려 더 또렷이 남았다. 설명하지 못한 것들은 언제나 쉽게 잊히지 않으니까.  단지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에 마음이 동요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세사는 어쩐지 화가 나 있었다. 누구에게? 패신저에게? 병실을 관리하는 누군가에게? 아니면—자신에게. 감정은 명확히 가늠되지 않았고, 이름 붙여지지도 않았다. 분노도, 연민도, 책임도 아니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무게감만은 확실했다. 단 하나 분명한 건, 이것이 ‘아무도 챙기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세사는 식판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이 가라앉듯 떠올랐다. 밥을 해줘야겠다. 어이없을 만큼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그 생각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그 순간만큼은 확신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말없이 병실을 나와 조리실로 향했다.  조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직접 밥을 해 먹는 사람도 드물었다. 세사는 문을 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켰다. 낮은 조명이 천천히 공간을 덮자 해야 할 일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냄비를 꺼내 물을 올린다.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동작.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의 시선은 이미 불 위에 올려진 냄비에 닿아 있었고 물은 서서히 끓고 있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일.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어 세사는 붉은 렌틸콩을 씻었다. 작고 흐물거리는 알갱이들이 체를 따라 미끄러지는 것을 손으로 한 움큼 집어 냄비에 붓는다. 손끝은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정확히 움직였고, 동작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빠르지 않지만 단단한 리듬. 누군가에게 배운 솜씨라기보다, 반복 끝에 스며든 감각이었다. 평소에는 말이 많고 허세도 부렸지만, 지금 세사의 움직임은 그 어떤 말보다 조용하고 진지했다.  계량은 따로 하지 않았다. 눈에 익은 만큼, 손에 잡히는 만큼. 커민과 고수, 마늘 한 쪽, 약간의 올리브유. 그 정도면 충분했다. "……너무 정성 들이는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이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고요한 리듬 속에서 무언가 조금씩 익어간다. 냄비 속 렌틸콩은 녹듯 풀어졌고, 곧 향신료의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뚜렷한 경계 없이 무르게 녹아드는. 부드러운 김이 피어올라 오래 머문다. 이내 완성될 터였다.  세사는 잠시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패신저가 이걸 굳이 먹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남길지도 모른다. 그건 그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이걸 먹일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는 감정. 그 감각을 그는 너무 오래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병실 문이 가볍게 열렸다. 패신저는 침대에 기댄 채 깨어 있었다. 세사는 말없이 다가가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김이 피어오르며 부드러운 향이 조용히 퍼졌다. 의아함과 피로가 섞인 시선이 그를 향한다. “이걸 왜.” 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를 끌어 침대 곁에 앉고,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그러곤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떴다. 손에 감기는 무게를 느끼며, 말없이 그것을 내밀었다. 패신저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도 감정을 감춘 무표정한 눈동자로 세사를 바라본다. 마치 그의 속내를 읽으려는 사람처럼.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첫 입은 내가 먹이는 거야.”  패신저는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가 세사의 얼굴을, 숟가락을, 그리고 그의 손을 차례대로 훑었다. 잠시 스쳐가는 침묵. 그리고 그가 마침내 말없이 입을 열었다. 아무런 설명도 붙지 않았으나 세사는 이해했고, 한 숟가락의 스프가 천천히 건너갔다. 느리고 조용한 목넘김. 그리하여 장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패신저는 맛에 대한 말도, 감정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세사가 만든 스프였고, 세사가 내민 한 입이었다. 거절당하지 않았으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짧은 숨이 흐른다. 손끝에 얹힌 스푼이 어쩐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단지 그의 입술에 닿았을 뿐인 그 감촉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경계를 머금고 있었다. 세사는 조용히 손을 거두고, 스푼을 트레이 위에 내려두었다. 패신저는 아무 말 없이 그 스푼을 들었다.  “……다신 안 해준다.”  조금 늦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숨을 쉬듯 툭 내뱉은 한마디. 투정처럼, 핑계처럼,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이 들켜버린 감정을 덮기 위한 장난처럼. 그 말은 조용히 공기 중에 머물렀고, 패신저는 끝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는 이제부터였다. 그는 말없이 한 입, 또 한 입을 넘겼고, 세사는 맞은편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주고받는 느낌은 없었다. 입이 열리고, 음식이 넘어가고, 숟가락이 다시 그릇으로 돌아가는 동작만이 반복됐다. 말도,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줄어든 채. 묘한 정적이 공간에 스며들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잔열처럼.  절반쯤 먹은 뒤 패신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세사는 말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조용히 식기를 정리하던 그는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맛은…… 있었냐.”  “있었습니다.”  짧고 간결한 대답. 빈말도, 과장도 없는 그의 말투. 세사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신 안 해준다.”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식기를 치우는 손끝은 조심스러웠고, 트레이 위에 숟가락을 가지런히 놓은 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패신저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 금방 잠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깨어 있는 느낌도 아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안전하다’는 뜻처럼 읽혀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숨을 고른다. 식사는 끝났고, 대화도 끝났고, 더 이상 돌볼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방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감정이라고 부르기엔 어쩐지 이른—그런 무언가. 그렇다고 느낀다면 이상한 쪽은 역시 자신일까.  세사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다시 닫았다. 병실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처음과 닮았지만 조금은 다른 고요였다. 이번 고요는 약간 더 따뜻했다.  복도는 낮게 깔린 조명 아래 조용했다. 세사는 병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시선을 내렸다. 손에는 트레이와 접어둔 행주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가벼운 것들이었지만, 어쩐지 그 무게가 어깨에 닿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벽을 따라 되돌아오는 동안에도, 발끝의 무게는 설명되지 않았다. 감정일까, 방금의 온기 때문일까.  “……됐잖아.”  투덜거리듯 중얼거린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려는 말투였다. “밥도 먹었고, 말도 했고, 눈도 마주쳤고…… 뭐.” 그 혼잣말은 반박처럼 들리기도 했고,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끝이 흐려지는 동안에도 세사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복도 끝, 분리수거함 앞에 다다르자 그는 식기통을 비우고, 접어두었던 행주를 다시 손에 쥐었다. 천장 조명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마 감정이란 것도 그런 거겠지, 깜빡이되 꺼지지 않는 것. 세사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음엔, 반찬을 좀 더 늘릴까.”  그 말은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벼운 말, 일정한 걸음걸이. 병동의 긴 복도에 비추는 이른 오후의 햇살. 적막한 고요는 그대로였지만 이제 세사는 그 안에 작게 남은 무엇을 느낀다. 말이 되지 못한 것, 허나 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렇다면 어쩌면 ‘다음’이라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